고유명사
30년대 초,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재준의 눈에 비친 한국 교회상은 가련한 것이 었다. 선교 50년이 지났다는데 아직도 "삼촌(미국) 덕에만 살려는 못난 아들"이다. 한국 교회사는 "한국의 교회사"가 아니라 미국 선교 역사의 한 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적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미국 선교사들의 사상 테두리 안에서 사는 미성년자의 구실을 하고 있는 집단이다. 그리하여 그는 장로교를 중심으로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소위 정통주의라는 미국의 보수주의 사상의 실상을 밝히었다. 종교개혁 시대 직후 생긴 정통주의 신학과 성서의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이 18세기에 이르러 유럽에서는 몰락의 쓴 잔을 마셨다. 그러나 그 잔병들이 19세기 말 미국 프린스톤에 모여 반격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오래 가지 못하고 소수파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19세기 말엽의 프린스톤 출신들이 한국 초대 선교사로 나오게 되어 그 정통주의 신학의 몰락 직전의 몸부림을 이 한국에 이식하고 철의 장막으로 둘러막아 50년을 보호 육성한 것이 한국 장로교회의 정통주의 왕국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이 정통주의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세계 교회의 본류에 합류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자주적인 한국 교회사를 형성해 갈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혁신을 위해 장공이 평생을 바친것은 "한국교회를 위한 세계적 교역자 양상"을 목적한 신학교육이었다.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한 신학교육은 그들이 심은 보수신앙을 지키기에 알맞은 교역자 양성을 목적한 것이었다.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이를 이단시 했으며, 현대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이라하여 이를 배척했다. 그러나 장공이 시도한 신학교육은 세계 신학계와 호흡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해방 후 보수주의 신학진영이 지배하던 장로교 총회는 드디어 김재준을 심문하고 자유주의 신학자로 단죄한 다음 그를 이단으로 제명 처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유동식, 이단자의 후예들을 기리며, 한국문화신학회 제 5집, 이용도, 김재준, 함석헌 탄신 백주년 특집 논문집, 한들출판사, 2001. 13-14)
인물 현대사에서 인상 깊게 본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시간이 흘렀고 가지고 있던 평전도 다른 사람에게 선물 한 뒤에 내용도 고스라니 잊어버렸다. 결국 '장공 김재준'이라는 고유명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XX: 목 좋은 곳에서 사기 치는 사람이라는 이른바 확정기술로 어지럽힐 필요도 없는 고유명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