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길 - 미셸 트루니에

나무와 길
미셸 트루니에
나무는 수직적이고, 길은 수평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무는 한군데에 붙박여 있는 안정성의 상징이다. 반면에 길은 순환의 도구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언덕. 숲. 집들뿐만 아니라 강이나 철길 따위의 풍경을 바라보면, 우리는 풍경이 이루고 있는 조화라는 것이 한군데 머물러 있는 덩어리들과, 소통의 역할을 하는 길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이 사물들 중의 어떤 것들은 중성적이다.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은 그것들 위로 빠르게 스쳐지나갈 수도 있고, 또 그 위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언덕과 골짜기, 평야가 그러한 경우들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 풍경들을 역동적인 것으로 보기도 하고,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른 것들은 그 본성상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나무와 집이 주로 그러한 경우이다. 어떤 풍경들은 역동적인 활기를 지니고 있다. 경우에 따라 역동성의 정도는 차이가 난다. 길과 강물이 그러한 경우이다.
그런데 이 풍경들이 언제나 평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일단 평형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유지되지도 않는다. 파도의 습격을 받으며 암초 한가운데 버티고 서 있는 등대, 까마득한 벼랑 위에 높이 앉아 있는 성채, 접근할 길이 보이지 않는 숲속에 파묻혀 있는 나무꾼의 오두막집 등은 비인간적인 분위기에 비극적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분위기는 고립과 공포, 심지어는 범죄의 충동마저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이러한 곳들은 너무나 고정되어 있어서, 감옥과도 같은 부동성(不動性)이 바라보는 사람의 가슴을 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가슴을 공포로 떨게 하고 싶은 이야기꾼은 오솔길이나 길을 통해서 외부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이러한 단절된 풍경들을 이용할 줄 안다.
그러나 그것과 정반대되는 불균형이라고 해서 그 심각성이 덜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불균형은 현대 생활에 의하여 끊임없이 야기되는 불균형이다. 도시는 두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 한 가지는 주거의 기능이며, 다른 한 가지는 순환의 기능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거주의 기능이 어디에서나 순환의 기능에 의해 희생당하고 또 무시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현대의 도시들은 순환의 기능을 더욱더 강화하기 위해서 나무들이나 분수대. 시장. 강둑 등을 빼앗기고, 점점 더 거주에 적합하지 않은 형태로 변해 간다.
도로를 이루고 있는 물질도 도로의 너비만큼이나 이 변화의 요인이 된다. 돌이 깔려 있는 마을길이나 흙길을 아스팔트 포장 도로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사람들은 색깔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마을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의 역동성을 뒤집어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흙이나 돌로 된 표면은 울퉁불퉁하고 거칠고, 무엇보다 물이 스며든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그 위에 조심스럽게 멈추게 되고, 물이 스며든다는 특성 때문에 땅속 깊은 곳과 관계를 맺게 된다. 반면에 물이 스며들지 않는 아스팔트의 너무나 매끈한 표면 위에서 사람들의 시선은 미끄러져서, 방향을 바꾸어 멀리 지평선을 향하게 된다. 나무와 집들은 도로 때문에 토대에서 들떠 있어서, 빙빙 도는 미끄럼틀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것처럼 흔들려 보인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토록 옛날의 화강암 포장도로를 찬양해 마지않는 것이다. 그것은 고집스러운 개인주의와, 파괴할 수 없는 둥근 곡선, 그리고 매끄러움을 역설적으로 한데 이어놓는다. 울퉁불퉁하고 군데군데 틈이 벌어져 풀이 나있는 것을 바라보면 마음이 즐거워진다. 자동차 바퀴에게는 즐거운 일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생각의 거울, 82-84)
같은 글이 [짧은 글 긴 침묵-미셀 투르니에 산문집,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 에 있어 아래에 옮겼다. 생각의 거울과 짧은 글 긴 침묵 중 한권만 사실 분이라면 짧은 글 긴 침묵을 개인적으로 추천 드린다.
나무와 길
미셸 트루니에
당신이 어떤 풍경-언덕과 숲과 집들, 그리고 또한 강과 길들-을 유심히 본다면 그 풍경의 조화가 그 속의 붙박이인 덩치들과 그것을 이어주는 길들, 그 양자 사이의 미묘한 균형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풍경 속에 인간은 있지 않아도 좋다. 움직이는 것과 머물러 있는 것 사이의 상관관계는 달려가거나 잠자는 이가 없어도 잘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사물들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물들 가운데서 어떤 것들은 중립적이어서 관찰자의 눈이 그 위를 훑고 지나갈 수도 있고 그 위에 딱 멈출 수도 있다. 가령 산이나 골짜기나 평원 같은 것이 그렇다. 각자 마음 내키는 대로 거기에다가 역동성을 부여할 수도 있고 정태성을 부여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물은 본질적으로 뿌리박힌 것들이다. 원칙적으로 나무나 집 같은 것이 그렇다. 끝으로, 어떤 사물들은 많게든 적게든 격렬한 역동성의 충동을 받고 있다. 길이나 강이 그렇다.
그런데 그 같은 균형이 항상 이루어지기란 매우 어렵고 또 그 균형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지속되기란 어렵다. 파도가 밀려와 부서지는 암초들 한가운데 세워진 등대, 가까이 갈 수 없는 바위 위에 덩그렇게 올라앉은 요새, 눈에 보이는 통로 하나 없이 숲 속에 파묻힌 나무꾼의 오막살이는 고독과 공포, 심지어 범죄의 기미가 느껴지는 그 어떤 비인간적인 분위기에 필연적으로 휩사여 있다. 거기에는 거의 감옥과도 같은 불변성과 부동성이 가슴 찟어지도록 너무 많이 고여 있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려는 이야기꾼은 오솔길 하나 나 있지 않은 그런 꽉 막힌 풍경들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안다.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불균형도 못지않게 심각하다. 그것은 바로 현대의 생활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불균형이다. 도시는 두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 주된 것은 거주 기능이고 부차적인 것은 왕래 기능이다. 그런데 오늘날 자세히 살펴보면 어디서나 거주는 무시당하거나 왕래를 위하여 희생당한 나머지 우리는 도시들은 점점 더 편리한 왕래에 나무도 분수도 시장도 강둑도 빼앗긴 채 점점 더 거주하기가 불편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길을 만드는 재료 자체는 길의 넓이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포석을 깐 마을의 도로나 흙길을 아스팔트 길로 교체함으로써 사람들은 색깔만 바꿔놓은 것이 아니라 시야의 역동성과 그 마을의 의식을 뿌리째 흔들어놓은 것이다. 왜냐하면 돌과 흙은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꺼칠꺼칠하며 무엇보다도 투과성이어서 눈길은 닿으면 걸리고 시선은 멈춘다. 그리하여 그 투과성 덕분에 깊은 땅속 세계와 관련이 맺어진다. 온통 반들반들하고 방수처리된 아스팔트의 띠에 닿으면 눈길은 미끄러지고 시선은 빗나가서 먼 지평선 쪽으로 튕겨진다. 이 화살표 같은 길 때문에 존재의 바탕이 손상당한 나무들과 집들은 빙빙 도는 미끄럼틀 가에 서 있는 듯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다. 바로 이러 이유로 해서 굵직굵직한 화강암 덩어리로 깐 옛적의 포석은 더할 수 없이 귀중한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이게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둥실둥실함과 반드러움에다가 눈에도 정신에도 다같이 즐거움인 (비록 차바퀴에는 즐거움이 못 될지언정) 불규칙성과 풀이 자랄 수 있는 틈을 만들어주는 절대적 개체성을 연결시켜 준다.
우리 문명의 작은 고민들 중 한 가지는 차바퀴와 발이 서로 양립 할 수 없는 요구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바퀴는 고른 평면과 고무로 만든 트랙 같은 점착성을 원한다. 그것은 푹푹 빠지거나 덜커덕거리거나 특히 미끄러지는 것이라면 아주 질색을 한다. 반면에 발은 그런 것에 잘 적응할 뿐만 아니라 미끄러지는 것을 재미있어 할 줄도 안다. 그러나 발이 특히 좋아하는 것은 모래나 자갈이 살짝 덮인 바닥을 소리내어 밟으면서 마치 양탄자 위를 걷듯이 약간씩 약간씩-너무 지나치지 않게-빠지는 것이다. 발은 탄력 없이 단단하기만 한 표면에 닿아 아프게 튀어오르기를 원치 않는다. 해가 날 때 일어나는 약간의 먼지, 비 올 때 생기는 약간의 진창도 삶의 질의 일부인 것이다. (짧은 글 긴 침묵-미셸 투르니에 산문집,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 195-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