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용 - 향나무판의 사연
향나무판의 사연, 김원용
우리집 현관문을 열면 마주 보이는데 벽 밑에 삼불암이라는 호를 자필자가한 울릉도 향나무 판이 놓여 있다. 울릉도의 높은 절벽에 자생하는 향나무는 이제는 귀해져서 이것을 선물로 받은 10년 전만 해도 주문을 하고 한참 기다려야 했다. 울릉도는 나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들이 얽혀 있는 곳이다.
내가 울릉도에 처음 간 것은 꼭 30년 전, 1947년 여름의 일이었다. 그때 나이 25세, 국립박물관에 갓 들어간 젊은 직원으로서 한국 산악회의 조사단을 따라 나섰던 것이다. 울릉도에서는 신라시대의 적석총이 많아서 젊은 고고학단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지만, 맑고 푸른 바다와 오징어 말리는 독특한 향기를 잊을 수 없었다.
두번째 간 것은 6.25 동란도 한고비 넘은 1952년이었고 이때도 역시 산악회의 조사단에 끼어서 건너간 것이다. 나는 울릉도와의 재회를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산수는 여전히 맑았고 밤이 되면 먼 바다의 오징어배 등불이 떨어진 별들처럼 아름다웠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성인봉을 내려오다 나리동 계곡에 떨어진다. 모두 앉아서 쉬고 있는데 나 혼자 계곡에 가로질러진 썩은 다리를 건너다 다리와 함께 떨어져 아차 하는 순간에 바위에 이마가 깨어지는 중상을 입은 것이다.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나는 급히 만들어진 들것에 실려 천부동으로 운반되고 거시서 배를 타고 도동으로 돌아왔다. 여기 조그만 병원에서 이마를 꿰멘 나는 하룻밤을 묵고 여관으로 옮겼다. 차분하게 생긴 간호원은 어느새 나의 피 묻은 옷을 빨고 다려서 떠나는 나에게 안겨 주었다. 멀리 집을 떠나서 홀로 누워 있는 나에게 그 따뜻한 마음을 잊을 수가 없었다. 부산에 돌아와서 나는 일그러진 이마를 다시 수술하고 울릉도의 일들을 조그만 글씨로 써서 어느 신문에 실었다. 그리고 그것을 오려서 조그만 감사의 말과 함께 이름도 모르는 그 간호원에게 보냈다. 회답이 오고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알았다. 그러나 그 뒤 또 편지를 보낼 용기도 이유도 나에게는 없었고, 나는 곳 몇해 동안의 미국 유학을 떠났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없는 사이에 그녀가 박물관으로 부친 오징어 꾸러미가 '받을 사람 없음'으로 되돌아가 나는 그녀에게 행방불명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세번째로 울릉도를 찾은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963년 9월이었다. 국립박물관에서 간행할 울릉도 조사보고서의 원 고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또 한번 찾아간 것이다. 세번째 보는 도동의 모습은 10년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찾아간 나는 이제 이마가 넓어지기 시작한 41세의 장년이 되어 있었다. 나는 현포로 가기에 앞서 추억 새로운 도동의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간호원도 보이질 않았다. 그녀는 병원을 떠나 약국을 차리고 있었고, 10년 만에 보는 그녀도 이제 아주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처음 나를 몰라 보았다. 그리고는 기억이 되살아난 휘둥그래진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아직도 독신인 모양이었다. 현포에서 도동으로 돌아오는 날 저녁에 마침 포항으로 떠나는 배편이 있어서 다음 배로 가라고 말리는 그녀와 부두에서 작별하였다.
그로부터 다시 4년, 몇 장의 편지가 오고간 1967년에 그녀는 서울로 나를 찾았다. 곧 결혼을 하게 되어 있단다. 사람이란 나이가 들면 별다른 의미에서 서로 의지할 이성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가. 인생은 갈수록 고독해 지는 법이다. 그 뒤 10년, 우리는 다시 소식을 바꾸지 못했다. 서로 만나고 싶어도 인생도 오십을 넘으면 육신의 늙음이 용기를 가리우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보내준 향나무판을 언제나 향기가 새롭다. 물건이란 허무한 것 같지만, 사람보다 오래 남는 인생의 기념물이 될 때가 있다. 인생은 긴 것 같으면서 사람 하나 제대로 만나도 얘기할 기회도 없는가 보다. 한단(邯鄲)의 꿈 속에서 추억과 허무가 뒤섞인 향나무판이 오늘도 있을 뿐이다.
<<샘터, 1977.12, 나의 인생 나의 학문 -김원용 수필모음, 9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