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년 - '씨알'이 '애국지사'가 되던 날
오랜만에 김조년 교수님이 발행하는 표주박 통신을 찾아 읽다가 함석헌 선생님에 관한 내용이 있어서 옮겨 본다.
김조년, '씨알'이 '애국지사'가 되던 날
2006년 10월 19일은 청명한 날이었다. 파란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평화롭게 떠다니고 있었다. 대전국립현충원의 넓은 묘역에는 고요가 가득하였다. 원래 그 곳은 평안한 땅이다. 주변에 둘러쳐진 산으로 아늑하면서도 옹색하게 보이거나 느껴지지가 않고 훤히 넓으나 힘없이 퍼져있다는 허한 느낌이 없는 곳이다. 대전이라는 큰 도시가 바로 붙어 있지만, 전혀 도심의 소음이나 번잡함이 전해지지 않는 곳이다. 누가 그곳에 국립묘지를 잡았는지 자리를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공원으로 잘 꾸며놓아서 봄부터 가을까지 많은 꽃들이 피는 것을 볼 수 있고, 잔디들이 잘 가꿔져 있다. 아무튼 정성을 많이 잘 쏟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19일은 바로 그 자리에 우리가 흠모하고 우러러보는 함석헌 선생이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되는 날이었다. 시간에 맞추어 갔다. 평상시, 이러저러한 씨알모임에서 종종 뵙던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선생의 후손들, 그러니까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와 손녀들 그리고 증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후 2시가 되어 다른 몇 분의 '애국지사' 또는 '호국지사'들과 함께 안장되는 식이 진행되었다.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고 조포가 울리고, 식을 진행하는 중요한 사람들이 차례로 합동분향소에 분향하고 꽃을 바쳤다. 그리고 유족들을 대표하여 각각 몇 분들이 그렇게 하였다. 하얀 종이로 싸인 유골항아리가 미리 파놓은 땅에 내려지고 흙이 뿌려졌다. 잘 고른 마른 흙이었다. 유족들이 먼저 흙을 뿌리고, 참석한 사람들이 흙을 뿌렸다. 일을 담당한 분들이 흙을 채우고 임시로 봉분을 만들고, 서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거기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묘한 기분에 싸였을 것 같다. 함석헌과 '애국지사', 또는 함석헌과 '국립묘지'. 이것을 연결시켜 생각할 때 이것들이 어떤 조합이 될 것인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물론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 마차산 자락에 묻혀 있던 님, 그 주변이 무수히 많은 쓰레기들을 묻는 폐기장으로 변한 것을 본 사람들은 그곳에 그 님을 그렇게 방치하여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특히 유족들은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어딘가로 이장하여야 할 것인데, 독립유공자가 되어 있었던 그에게 그대로 사설 묘지에 안장할 것인가? 아니면 국립묘지로 옮길 것인가를 논의하고 걱정하였을 것이다. 나중에 관리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하여서라도 어느 의미 있고 편리한 곳으로 이장하는 것이 바람직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국립묘지로 옮긴다면 서울 4.19묘지가 적절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고, 어떤 이들은 아예 국립묘지를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국립묘지 대전 현충원에 모셔지게 되었다.
그날 날씨는 참으로 좋았다. 춥지도 않았다. 멀리까지 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편안하게 느껴지는 자리였다. 그 자리를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들이나 음택을 고르는 사람들은 그 중에도 어느 자리가 좋거나 나쁘다는 것을 말하겠지만, 높고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아주 시원하고 아늑한 곳으로 일단은 좋다고 느껴진다. 그런데 내 맘이 참으로 답답하였다. 함석헌은 국가주의를 온 몸으로 반대하였다. 그러나 국립묘지란 개념은 원래 국가주의의 산물이다. 그가 그 자리에 묻혔다. 함석헌은 높낮이를 알 수 없고, 멀고 가까움을 모르는 훨훨 나는 자유혼이다. 그런데 국립묘지엔 아주 질서정연하게 규격에 맞추어진 틀 속에 박히는 전형의 전형이다. 그 자유혼은 그렇게 짜여진 틀속에 감금된 형상이 됐다.
그는 돌아가실 때 당신을 해부하여 학생들의 실험용으로 하라는 그의 스승 이승훈의 유언을 들어드리지 못한 것을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일생을 살았다. 그래서인지 그도 당신의 몸을 표본으로 만들어 실험용으로 쓰게 하라고 하였지만, 유족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화장되어 한 줌의 재로 유골함에 담겨져 모두가 찾을 수 있는 이곳에 묻혔다. 그는 사람을 겉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있고 없고, 잘나고 못나고, 이쁘고 밉고, 높고 낮고, 가지고 없고로 판단하지 않았다. 그런데 국립묘지에는 사회에서 가졌던, 아니 사회에서 판단하는 위계체계에 의하여 판단된 모습으로 철저하게 계급이 달려져 묻힌다. 죽어서도 살았을 때 가졌던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구별되어 묻힌다. 쉽게 이름붙이고 개념 속에 넣을 수 없는 씨알이요 맨사람이요 들사람을 주장했던 그이는, 아니 그것으로 살았던 그이는 죽어서 꼼짝없이 '애국지사'란 이름으로, 3**호라는 번호로 관리되는 틀 속에 묶이고 말았다. 그것이 말을 쉽게 하지 못하게 하는 부분이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몰라주고,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는가를 몰라주는 것보다야 낫다고 하겠지만, 속 시원하지 못한 씁쓸함이 있다. 하기야 지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함석헌이란 인물에 대하여 물어보면 안다는 사람이 지극히 적다. 이런 판에 그를 알릴 수 있는 길을 찾는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 알 만한 사람들이 오면, 안내할 사람들이 오면 국립현충원으로 간다. 어느 친구는 때때로 맘이 울적할 때 그가 묻힌 그 자리에 가서 한 참을 서성이고 온단다. 어느 누구는 정월 초하루가 되면 빠짐없이 그이의 묘소를 찾아 꽃다발을 올리고, 술 한 잔 올리며, 정성스럽게 절을 바친다. 연천 그 산 속에 있을 때는 농사삼아 일삼아 찾아가야 했지만, 물론 그 정성과 바치는 맘이 보통 큰 것이 아니라서 매우 좋은 것이지만, 여기 대전에 있는 묘는 찾기도 쉽고 생각하기도 쉬워서 좋다는 것이다. 누구는 그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대전에서 오르내리며 정성을 바치더니, 선생님을 이곳으로 모셔오게 되었네요.' 그럴까? 그냥 하는 소리겠지만, 정말 그러할까? 그 뒤 몇 번 그곳을 찾으면서 생각해 보았다. 과연 함석헌은 이 자리가 그이의 자리라고 생각할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 당신 묘에 비석이나 어떤 표시를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고, 그렇게 하기만 하면 돌아와서 깨부셔버리겠다고 강하게 말씀하기도 하였으니까.
그러나 평가와 모심과 처리는 뒤에 오는 사람들의 몫이다. 평가는 다른 말로 하면 모심이다.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고 싶은가 하는 것은 뒷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그를 찾는가 하는 것과 일치한다. 그래서 기리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책을 만들고, 그의 삶과 사상을 연구하는 모임을 만들고, 기념비를 세우고, 조각상을 조성하고, 해마다 그가 낳거나 죽은 날을 기념하여 의미 있는 행사를 하거나, 기념하는 조직과 단체를 만들기도 한다. 때로는 그의 사상을 실제로 살아보려는 삶의 형태를 꾸려보기도 한다. 그렇게 하여 기리는 사람이 기림을 받는 사람의 사람됨과 정신을 이어가려고 하고,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이어주려고 애쓴다.
이렇게 애쓰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씨알 그가 '애국지사'가 되어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에 상징의 팻말 하나 세워두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씨알이 애국지사로 규정되는 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지만, 애국지사를 거쳐 다시 씨알로 살아난다면 괜찮은 일일 것이다. 이제 할 일은 씨알로 살아나게 할 일이다. 그가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씨알이 씨알로 퍼지고 자라고 다시 꽃이 피고 열매를 끊임없이 맺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주의, 계급주의, 패권주의, 전쟁제일주의, 물질과 경제제일주의, 경쟁과 자기폐쇄주의 따위를 훼파하고, 훨훨 나는 자유혼의 들사람들이, 맨사람들이, 씨알 되어 자유롭고 평화롭게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는 일이다. 그 때는 '애국지사'란 돌팻말이 사라지고 씨알이라는 산 정신이 훨훨 날아오를 것이다. 아니, 그가 어떤 형식과 틀 속에 갇히든지 상관없이 훨훨 나는 수많은 씨알들이 꽉 막힌 듯한 국립묘지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야. 비록 틀 안에 갇히는 인생이지만, 그것을 넘는 어떤 자유를 상징하는 삶을 기다리는 것이겠지. 그것이 의미겠지.(2007. 1. 1. 성묘를 마치고 돌아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