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2004 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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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25. Thursday

주문한 책

오늘 책이 왔다.
김남주 평전 (한얼미디어)
내가만난김남주 (이룸)
케테 콜비츠 (실천문학사)
어두어진다는 것 (나희덕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박규리 시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시선집)
랭보시선십(홍익출판사)
성경전서(표준새번역 개정판)
진작에 보았으면 좋았을 것도 있고,
거름지고 따라가는 것도 있고
다치바나식으로 볼것도 있고
두고 두고 볼 것도 있다.



2004.03.25. Thursday

800만명의 교육소외계층

2004년 1월 7일자 연합뉴스에 따르면, 6세 이상 전체인구 4천2백만명 중, 800만명 이상이 중학교 졸업 미만 혹은 고등학교 졸업미만의 교육소외계층이다.

(서울=연합뉴스) 강의영기자 = 중학교 졸업 혜택을 받지 못한 교육소외계층이 425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 방송중학교 설립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7일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6세 이상 전체 인구 4천217만명 중 초등학교 졸업자 402만명과 중학교 중퇴자 23만명 등 425만명이 중학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것으로 집계됐다. 또 고교졸업장이 없는 398만명을 합하면 6세 이상 인구 가운데 20% 가량이  중.고등학교 교육이 필요한 교육소외계층이다. 중학교육이 필요한 성인 비율은 전남.충남 각 17.8%, 경북 15.2%, 강원  15.1%, 충북 14.4%, 전북 14.1% 등의 순이었고 서울이 6.83%로 가장 낮았다. 고졸 미만자가 중졸과 고졸 학력을 취득할 수 있는 채널은 검정고시와 학력인정 학교이지만 작년까지 이들 제도를 통한 중졸 학력 취득자는 소외계층의 0.55%인 2만3천479명에 불과해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이와 관련, 교육개발원은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근거로 방송중학교 설치를 통해 저학력자들에게 별도 교육기회를 제공하자고 제의했다. 중졸학력 미소지자 1천42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87.7%가 방송중학교 설치.운영의 필요성에 찬성했고 57.8%는 방송중학교에 직접 다니겠다고 대답 했다는 것이다. 또, 중졸학력 취득 대안으로 초.중.고 과정을 한꺼번에 운영해 출석수업과 방송수업을 병행하는 성인종합학교 설립(37.7%), 청소년 및 성인이 다닐 수 있는 별도의 대안 중학교 설립(24.3%), 라디오 방송, 학습지, 출석수업을  병행하는  방송중학교설치(22.3%), 사이버 과정으로 이뤄진 인터넷 중학교 설립(13.9%) 등을 꼽았다. 심웅기 교육개발원 평생교육센터 소장은 "평생학습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이 의무교육 단계의 기초교육이지만 적절한 제도가 없는 실정"이라며 "방송중학교 설립을 위한 법적 근거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004.01.07
야간 자율학습 하지말고 이런 것 좀 하면 좋겠다.......

2004.03.14. Sunday

걷기에 참 좋은 날

오랜만에 걸었습니다.
배낭에 한 가득 짐을 싣고 사무실에 부려놓고, 카보로를 다녀왔습니다.
오픈아이에 가서 커피 한잔을 하고, 슈퍼에 들러 장을 보고 배낭에 채우고
이곳 저곳을 구경 하다 왔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걸어보니 평소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더군요.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 '아~ 아름다워라' 를 연발하다.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난..시간적.물질적 편이가 있구나."
"..............................."
한동안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곧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올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계속 가라앉을 것인가에 제 고민과 불안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지금 보니 그냥 개울물 입니다.
저는 발목에도 안차는 개울물에 그냥 서 있었던 겁니다.
딛고 다시 오를 바닥도 없고, 가라앉을 곳도 없는..
그냥 건너가면 되는 개울물 말입니다.
개울물 후딱 건너 가야겠습니다.



2004.03.13. Saturday

웰빙에 관해 속 시원히 읽은 글

대학동기 김미향이 홈페이지에 올려준 글

웰빙에 관한 가장 속시원히 읽은글 

웰빙바람이 분다고 호들갑 떠는 사람들 때문에 단어조차 모르던 내가 웰빙을 찾아 네이버에도 물어보고 이곳저곳 돌아다녀 봤지만 온통 쓰레기더미 였는데 어느날 우연히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배달나가는 식판위에 올려진 신문지에서 웰빙을 발견했으니


[도발칼럼]웰빙을 말하는자, 들으라

바야흐로 ‘웰빙’ 운운하며 제 한 몸 무병장수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기 위해 발악트위스트를 추는 웰빙족과 웰빙 트렌드가 온 도시에 범람하고 있다. 요즘 각종 매체에서 단골 접사(接寫)되는 게 바로 ‘웰빙’에 관한 것들이다. 각 매체에서는 천연 자연식과 자연에서 얻어진 뷰티 아이템, 아로마테라피, 요가, 첨단 피트니스 스파 리조트 등에 관련된 기사들을 앞다투어 다루고 있다. ‘젊음의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해 좀더 자연을 쥐어짜는데 박차를 가하자’고 부르짖는다. 인간이 하루에 섭취하는 물은 대략 1ℓ, 음식은 2,300kcal, 공기는 25㎏에 달한다. 그러나 인간 삶의 ‘웰빙’의 근원이 되어 주는 거대한 자연이 회복되지 않는 한 아무리 ‘웰빙 호들갑 이단 옆차기’하며 내추럴 붐에 휩싸여봤자 말짱 헛것이다.

수천 만년 동안 생성된 석유를 단 150년만에 반이나 퍼 쓴 인간이 자연에게 보복 조치를 당하고 있는 건 당해 싼 일. 뭔가 몸에 이롭다고 하면 환장을 해서 자연을 쥐어짜고 고갈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인간들이여, 이제는 제발 자연을 발췌하고 삥 뜯어 쓰는 걸 잠시라도 멈추고, 자연을 회복시키는 데 ‘웰빙’의 초점을 새롭게 맞춰주길 바란다. 보다 잘 먹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이름도 희한한 오리 닭독감, 광우병, 돼지콜레라가 나돈다고 생선과 유기농 야채만 아가리에 처넣으면 일생을 병 없이 평탄하게 살아낼 수 있을까? 야채를 길러내는 땅이 오염되어 있는데, 야채라고 무사할 리 있겠는가.

양심에 말기 암세포가 빠글거리는 인간들로 살고 있다는 데에 전혀 쪽팔림이 없는 나와 너 그리고 모든 인간 여러분을 볼 때마다 하루에 세 번쯤은 이 인간이라는 종이 멸망당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돈 푼깨나 가진 부류의 내추럴리즘에 대한 조잡한 욕망은 ‘웰빙’이 아니다. 병든 지구의 자궁인 자연을 복원하는 데, 조금이라도 미력을 보태지 않는 자들, 자연을 파괴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자들이 제 한 몸 매끄럽고 윤택하게 가꾸기 위해 자연에서 무언가를 계속 얻어 쓰려하는 건 바로 특급 갈취에 해당된다.

현재의 ‘웰빙’은 똥이다. 쪽팔린 줄 알아라. 인간들이여 그리고 너와 나여…. 지구의 물 부족 현상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 하물며 지구 반대편에서는 먹을 물이 없어서 대량의 사람들이 죽어 가는 이 마당에 이빨 닦을 때마다 컵을 사용하자고 맹세해 놓고도 매번 이빨 서른 번쯤 닦을 물을 철철 흘려 보내는 내 자신의 양심에 따귀를 갈기며, 이 글을 마친다.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친환경적 실천 방법의 모색… 절실, 절실 또 절실하다.

〈정유희·월간 PAPER기자〉


2004.03.13. Saturday

애오라지 흔들어라 Keep Rock'ng - 김도균

steve-dokyoon-kim 김도균 &  me
            예전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어린시절 외삼촌의 음악을 좋아 하지 않았습니다. 외삼촌이 새음반을 주고 가끔씩 긴머리를 늘여뜨리며 방송에 나올 때에도 그 괴기스러운 음악은 낯설기만 했습니다. " 나의 외삼촌이 연예인이야" 하고 젊은 조카의 술 안주거리로 전락해 버린 외삼촌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그 음악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대신, 언젠가 외삼촌이 대박을 터뜨려 조금 더 훌륭한 술안주거리가 되기만 바랬습니다...그리고 외삼촌이 잘 되면 나도 매니저 할 수 있겠다라는 낭창한 생각들........... 언제부터인가 (아마 같이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내가 하고 부터) 조금씩 외삼촌의 음악이 좋아지기 시작헸습니다 (물론, 가사의 모호함이 여전히 불편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그토록 열심히 그리고 묵묵히 해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존경심을 가지게 됩니다. 마흔의 문턱에 걸쳐있는 외삼촌, 그의 팬더기타, 가죽 점퍼, 길게 내린 머리, 그리고 조화롭지 못한 커다란 십자가 목걸이.. 이 모든 것들이 가끔씩 나를 혼란스럽게도 만들지만..지금 나는 외삼촌의 삶이 존경스럽고 그 음악이 좋습니다. ......중략.......나에게는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외삼촌이 있다는 기쁜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김도균의 음악여정
            김도균 그룹  앨범 <정중동> 라이너 노트에 김도균에 관한 소개의 글이 있어 여기에 옮겨 봅니다.
            초등학교때부터 영어 가정 교사 곁에서 능숙한 영어 회화가 가능했던 김도균은 종교, 철학, 물리, 역사, 우주 등에 폭넓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 꿈은 천체 물리학자였다고 한다. 중,  때부터 전기 기타와 바이올린을 배웠던 김도균은 획일적인 제도권 교육이 싫었다. 똑같은 기계적 인간을 양성하는 학교가 싫어 고등학교 1학년을 마지막으로 기타에 인생을 걸었다.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을 듣고 학교가 아닌 산으로 올라가서 교과서가 아닌 기타로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다.
            1985년 그룹 솔로몬에서 활동하던 시절 유현상(보컬), 김주현(베이스), 한춘근(드럼)과 함께 백두산을 결성해서 이듬해 데뷔 앨범 [Too Far! Too Loud! Too Heavy!]를 발표했다. 백두산은 신대철이 이끄는 시나위와 함께 한국의 헤비 메탈 음악의 르네상스를 견인했지만, 1987년 2집 [The Moon on the Baekdoo Mountain]을 발표한 후 해산했다.
            김도균은 일찍부터 한국의 국악에 관심이 많았다. 백두산 시절부터 그의 기타 솔로에는 국악적인 멜로디 라인과 리듬 패턴이 종종 선보이고 있었다. 이런 국악을 향한 김도균의 도전은 첫 번째 솔로 앨범 [Center of the Universe]에서 공개되어, "국악과 서양의 록이 접목된 새로운 스타일이 시도된 역작"이라는 세인의 평가를 얻었다. 조악한 음질과 국악에 대한 미약한 이해로 김도균의 실험은 다소 가려진 감은 없지 않았으나, 그가 행했던 한국적인 록, 국악과 록의 접목은 우리나라 대중 음악계에 신선한 파문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989년, 김도균은 록, 헤비 메탈의 본고장인 영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영국 출신의 뮤지션들과 함께 '사랑'이라는 그룹을 결성해서 활동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시나위 출신의 보컬리스트 임재범, 솔로몬, 시나위, 카리스마를 거쳤던 베이시스트 김영진, 솔로몬 출신의 드러머 유상원과 함께 한국 헤비 메탈 음악의 드림팀이라고 불렸던 '아시아나'를 결성했다. 일본의 헤비 메탈 밴드 'Loudownloadess'와 조인트 공연을 하고, 국내 최초로 영국에서 레코딩한 [Out on the Street]가 발표되었다. 김도균은 단 한 장 뿐인 아시아나의 앨범에서도 특유의 '가야금 주법'을 과시했으나, 이 화려한 함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92년에는 유현상이 탈퇴한 백두산을 재결성, 리더로서 백두산 3집을 발표했다. 자신의 사인 끝에 언제나 'Keeping Rock'을 새기는 김도균은 1989년 [Rock in Korea], [Power Together]와 같은 프로젝트 앨범에 참여해서 록의 부활을 시도하지만, 댄스 음악과 힙 합으로 무장된 새로운 세대의 감성을 뚫지 못했다. 독실한 크리스찬인 김도균은 1992년 이후 CCM 음악 활동을 하며, CCM 프로젝트 앨범 [빛으로 모두 함께] 참여, 1997년 미국 최고의 크리스찬 록 밴드 'Petra'의 내한 공연에 스페셜 게스트로 참가하기도 했다.
            1995년부터 MBC TV 국악 프로그램 [샘이 깊은 물]에 고정 출연하면서 대중들에게 아직도 그의 국악과 록을 결합하고자 하는 학문적인 연구가 식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으며, 1997년에는 한대수의 후쿠오카 라이브 밴드로 참가하면서, 한대수-이우창과의 음악적 공조를 이어왔다. 1999년에는 그동안 홀로 심취했던 국악-록의 연구에 다양한 록 밴드 활동을 해왔던 후배 베이시스트 배찬우, 드러머 박동식과 함께 오늘의 김도균 그룹을 결성하며, 상호보완의 관계에서 음악적 진일보를 기했다. 2001년 한대수 [The Last Concert]에서 김도균 그룹의 세 명의 멤버는 기타-베이스-드럼으로 공연의 중추를 담당했고, 2002년 6월 서울 독립 예술제와 10월에 있었던 Musicscape Euro Andes Korean Music Festival에 참가하면서 대중들의 검증을 받기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2002년 9월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기타리스트들이 한데 모인 프로젝트 앨범 [기타 제우스]에서 타이틀 곡 'Occupants'를 연주했으며, Kbs와 국악 중심이 공동 기획한 앨범 [아리랑] 참여했다. 그리고 김도균 그룹이 4년 동안 대외적인 활동을 유보한 채 오직 연구에만 전념했던 국악-록의 해법이 2002년 11월 [정중동(靜中動, Movement on Silence)이라는 타이틀로 발표하며, 좁은 한국이 아닌 넓은 세계 시장으로 우리 음악을 전파하기 위한 첫 걸음을 옮겼다.



2004.03.12. Friday

전화 한통

새벽 2시 30분 걸려온 전화. out of area....
... 이 시간에 전화 걸 사람이 누굴까? ...
혹시 누가 술 먹다가 전화 한것은 아닐까?
...아..아니야..그건 나지....
지우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잘 다니고 있다고 한다
입학식날 교실에 앉아있는걸 보고 한참 웃었다고 했다.
그런 희망과 보람이 있기에, 거기에 소중한 꿈이 있기에
오늘 모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가 보다.
잠은 깨버렸지만 한참을 훈훈하다. 고맙네 이사람아 ~

2004.03.11. Thursday

분노와 절망을 모아서 더 큰 힘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 최옥란

박경석님의 글을 읽고 노들야학 홈페이지를 찾아 갔습니다. 거기도 게시판에 음란광고물들이 난리를 치고 있더군요. 그 사이에 최옥란 열사 2주기라는 알림글을 발견 했습니다. 2년이 지났습니다...... 최옥란 열사 홈에도 방문해서 얼굴도 뵙고, "잊어버리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글과 사진을 이곳에 옮겨 적습니다.

명동성당 농성을 결의하며.

어느새 추운 겨울이 벌써 성큼 다가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12월 3일부터 명동성당에서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하여 텐트를 치고 농성을 계획하고 있는 최옥란입니다. 저는 1급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최근에는 목 디스크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제가 추운 겨울에 텐트농성을 결심한 것은 일도 하지 못하게 하면서 최저생계비 아니 생존자체도 보장하지 않고 있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때문입니다.

저는 청계천 도깨비 시장에서 노점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기초법이 시행되면서 정부는 저에게 노점과 수급권 둘 중에 한가지를 선택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저는 의료비 때문에 수급권을 선택하고 노점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점조차도 포기한 저에게 정부는 월 26만원을 지급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시청과 구청 그리고 동사무소를 찾아다녔습니다.

제가 지불해야 하는 약값만 해도 26만원을 넘는데... 아파트 관리비만도 16만원인데... 도대체 나보고 26만원 가지고 어떻게 살라는 건지? 그러면서도 최저생계를 보장한다는 것인지? 처음에는 실무과정에서 착오가 있으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최저생계비가 워낙 낮게 책정되었을뿐만 아니라 장애로 인하여 추가로 지출되는 비용이 전혀 반영되지 않고... 의료비도 비급여가 많아 저같은 중증장애인도 모두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약값도 안 되는 생계비로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그래서 보건복지부장관에게 국문총리에게 민원을 제기했지만 아무런 답변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답답합니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과 빚에 의지해야 하는 내가 너무 한심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최저생계를 보장한다는 기초법이 너무나 원망스러웠습니다. 한때는 죽음을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수급권을 반납하고 노점을 다시 시작하려고도 했는데, 한 번 반납한 노점자리를 다시 얻기란 불가능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명동성당에서 그것도 추운 겨울에 텐트농성을 결심한 것은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비단 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부터입니다. 수많은 수급자가 그리고 차상위 계층이 말도 안 되는 제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현실은 저에게 한편으로 힘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명확히 해주었습니다. 저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저와 꼭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조건이 저와 같은 행동으로 표출되지 못하게 하는 것일 뿐이지 정부를 원망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텐트농성을 계획하고 결정하면서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이 투쟁이 저 혼자만의 투쟁이 되지는 않을까? 나의 투쟁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많은 단체에서 저의 텐트농성에 관심을 가져 주시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텐트농성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정말로 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제도로 거듭나기를 희망합니다. 벌써 두 명의 수급권자가 자살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더 이상 수급자들이 자살하거나 저 같이 자살을 생각하지 않도록 바뀌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민, 사회, 장애인 단체에 부탁드립니다. 비록 지금은 저 혼자 텐트농성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저와 함께 하리라는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저와 같은 사람들이 분명 많을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많은 단체들이 저의 투쟁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비록 경험은 많지 않지만 정부를 상대로 하는 투쟁에서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농성에 지지를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투쟁이 꼭 승리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 모두가 여러분들의 두 팔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분노를 표출한 것일 뿐입니다. 이 분노를 더 모아서 큰 힘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더 이상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유지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럼 명동성당 텐트에서 뵙겠습니다.

뇌성마비 1급 장애인 수급자 최옥란 씀


아래는 최옥란 열사 장례식 당시의 보도자료의 한 부분입니다.

뇌성마비 1급 장애인 수급자 최옥란 열사 심장마비로 운명
수급권과 이동권 투쟁에 헌신적이었던 열사의 염원 기리기 위해 민중복지장 개최
'장애해방운동가 최옥란 열사 민중복지장' ... 3월 28일(목) 진행

뇌성마비 1급 장애인 수급자 최옥란 열사가 26일(화) 새벽 4시 운명하셨다. 최옥란 열사는 국민기초보장법의 어이없는 재산 기준으로 수급권을 반납할 처지에 놓여 자살을 시도했으나, 주변인의 도움으로 다행히 생명을 건져 병원에 입원하던 중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총 22개 노동·사회단체와 장애인 단체들은 장애인 이동권 쟁취 투쟁과 장애인 수급권 투쟁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셨던 열사의 뜻을 기려 '장애해방운동가 최옥란 열사 장례위원회'를 결성, 28일(목) 장례식을 치를 계획이다.

열사가 걸어온 길

1966년 출생
1988년 장애문제연구회 '울림터' 창립회원
1989년 장애인 고용 촉진법 제정과 장애인 복지법 개정을 위한 공대위 투쟁 활동
1990년 장애인 노동권 말살음모 저지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활동
1991년 '침묵에서 함성으로' 수화 노래공연 주연
1992년 장애인운동청년연합 활동/ 정립회관 정상화를 위한 공대위 활동
1993년 뇌성마비연구회 바롬 창립회원
1997년 전국노점상연합 중구지부 회원
1999년 민주노동당 발기인
2001년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 활동
2001년 2월 오이도역 장애인용수직리프트 추락참사를 규탄 서울역 선로점거 150만원 벌금형
2001년 12월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명동성당 농성단
2002년 3월 26일 새벽 4시 심장마비로 운명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2003년 8월 발간된 십시일反에는 최옥란 열사의 이야기가 있다.
그 중에서 몇장 올린다.

유승하, 새봄나비, 십시일反, 창비




2004.03.11. Thursday

노재훈 돌잔치

상규가 2004년 3월 11일에 올려준 노재훈 돌잔치 사진.



2004.03.06. Saturday

仁兄께,

仁兄께,
귀한 소식을 이렇게 전해주니 참 고맙습니다
오늘 오후부터 일주일의 봄방학 입니다.
많이 밀린 일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오늘 하루는 홑이불 처럼 가벼운 저녁입니다.
무르익은 봄날씨에 마음도 푸근하여
밤 인데도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어디에 있던지 봄은 봄인 모양입니다.
몸은 몸을 그리워 하고,
마음은 마음을 그리워 합니다.
이 밤이 지나면,
숨 죽이며 눈치보던 꽃들이며,
겨우내 목소리를 가다듬던 새들이며,
땅모래의 온기를 그리워했던 동네아이들이며,
미친듯 제 세상을 맞이할것 같습니다.

다만 꽃은 화려할때 진다는것이 유감입니다.
印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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